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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뮤엣인류이야기
[역사/문화] 히틀러는 왜 그렇게도 예술품 약탈에 집착했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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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의 제목은 "히틀러는 왜 그렇게도 예술품 약탈에 집착했는가?" 입니다.
1939년 9월 1일 독일 나치당 그리고 제3제국 총통인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온 유럽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뜨렸습니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미래 아리아인의 독일을 위해서 그리고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집시, 공산주의자, 장애인 그리고 유대인들을 학살 하였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초반에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우세한듯 보였으나
이후 1943년 연합군의 이탈리아 진격과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기점으로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고 연합군은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역공을 하며 진격하였습니다.
기어코 연합군은 차례 차례 여러 유럽의 도시들을 수복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인 조지 클루니가 직접 감독을 맡아 제작한 영화 "모뉴멘츠 멘(2014)"에서 나치 독일이 숨겨둔 예술작품을 찾는 미술사학자, 박물학자, 예술가들로만 구성된 특수부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연합군에 의한 유럽 도시들의 수복 과정에서, 1945년 5월 미군은 오스트리아 Altaussee에서 나치 독일에 의해서 약탈당한 수많은 유럽의 예술 작품들이 숨겨져 있는 소금 광산을 발견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Altaussee에서만 발견된 약탈된 그림만 무려 6500점이상이었습니다.
이 소금 광산에서 발견된 예술작품중에는 미켈란젤로의 "브뤼헤의 성모상 (Madonna of Bruges)", 얀 반 다이크의 "겐트 재단화 (Ghent Altarpiece)"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나치 독일은 여러 예술품들을 다루는 기관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점령한 지역의 예술품들을 약탈하였습니다.
그 중 가장 악명높은 예술품 약탈 기관으로는 1940년에 설립된 ERR (Einsatzstab Reichsleiter Rosenberg für die Besetzten Gebiete, 해석하자면 라이슬라이터 로젠버그 점령지 연구소) 이 있습니다.
이 기관은 파리에 설치 되었으며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담당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왜 그렇게 조직적으로 유럽의 예술품들을 약탈 했던걸까요?
여기에는 크게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유럽에서 가장 큰 박물관인 Führemuseum(총통 박물관)에 유럽의 유명 예술작품들을 전시하고 싶어하는 아돌프 히틀러의 야심.
둘째, 나치군 최고 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을 포함하는 여러 나치 고위 간부들의 개인적 탐욕
셋째, 나치 독일을 운영하기 위한 자금확보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예술작품에 집착하는 히틀러 본인의 야욕 입니다.
히틀러의 야심, 총통 박물관(Führemuseum)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이지만, 아돌프 히틀러 (1989 ~ 1945)는 나치 독일의 총통이 되기에 앞서 미술학도를 꿈꿨던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젊은 시절 미술가가 되는 꿈은 그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미술학교에서의 입학 거부와 함께 좌절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마음 속 깊이 스스로를 예술에 관해서는 전문가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나치당의 대표 그리고 1933년 나치 독일의 총통이 되어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으며
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린츠 (Linz)에 유럽에서 가장 큰 박물관인 Führemuseum(총통 박물관)을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물론 그의 야심은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린츠를 유럽의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며,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보다도 더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히틀러는 이 박물관에 여러 유럽의 유명 예술작품들로 채워넣기 위해서 점령지역의 예술작품들을 약탈하는 것에 대해서 서슴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술작품에 대해서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히틀러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편파적 인종주의적 관점을 여실히 보여주듯이 예술에 있어서도 편파적인 관점을 강하게 내비쳤습니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의 총통이 되면서 나치 독일이 추구해야할 예술관에 대해서도 규정을 지었는데,
그는 특히 19세기 이전에 독일 출신 예술가들에 의해서 그려진 고전적 양식의 초상화와 배경화를 이상적인 나치 독일이 추구해야할 모범적인 예술 양식으로 여겼습니다.
히틀러는 그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는 20세기 초에 생겨나기 시작한 큐비즘(Cubism), 퓨처리즘(Futurism), 다다이즘(Dadasim)과 같은 현대 미술을 퇴폐미술(Degenerate Art)로 간주 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이러한 현대 예술사조를 타락해가는 20세기 사회의 부산물이라고 비난해였습니다.
나치 독일 선전가인 괴벨 (Joseph Goebbels) 역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독일의 퇴폐 에술가들을 쓰레기라고 불렀습니다.
퇴폐미술 전시회 (Degenerate Art exhibition)
이렇게 히틀러는 나치 독일을 대표하는 작품들만을 예술품으로 인정했으며 그 외의 예술품들은 팔아 넘겨 나치당 자금으로 쓰거나, 불 태워 폐기 처분 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히틀러는 여러 문화 말살 정책을 폈는데,
이 중에는 유대인 관련 책을 태우거나 박물관 큐레이터들을 나치당원들로 바꿨습니다.
히틀러가 규정한 퇴폐 미술과 관련하여 1937년 7월 19일에 나치당 본부가 있는 뮌헨의 하우스 데 쿤스트(Haus der Kunst)에서는 "퇴폐 미술 전시회( Die Austellung "Entartete Kunst")"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 전시회에는 여러 나치당원 인사들과 대중들이 초청되어 나치독일에 부합하지 않은 현대 미술작품들을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정치 선전적 전시회 였습니다.
이 전시회는 당시 유럽 예술계에서 떠오르는 예술사조인 모더니즘의 중심에는 유대인들이 있으며 이는 독일인들의 품위에 해를 가한다는 음모를 알리기 위해서 기획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전시회에 전시된 작품들의 112명의 작가들중 오직 6명만이 유대인 작가였습니다.
이 전시회에서 히틀러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 미술은 (퇴폐미술로 인해서) 아주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이런식으로 히틀러는 정치적인 수단으로 현대 미술을 말살하고 나치 독일에게 유리할만한 작품들만을 예술로서 인정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히틀러는 본인의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뛰어난 유럽의 예술작품들을 적극적으로 몰수하거나 약탈하였습니다.
약 20 퍼센터의 유럽내의 예술작품들이 나치 독일에 의해서 도난 당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중 약 100,000점 이상이 원래 정당한 주인들에게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학자들이 말하기를 나치 독일의 조직적 예술품 약탈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예술적 상처와 손실을 남겼다고 말합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미 정부의 추정에 따르면 나치 독일은 유럽의 모든 예술품들중 5분의 1을 개인 소장가들에게 팔아넘기거나 몰수 했다고합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몇몇의 중요한 예술 작품들은 아예 실종 되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히틀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박물관을 세워 유럽의 유명 작품들로 채워넣으려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유럽의 예술품들을 약탈했으며 이는 오히려 유럽의 예술사적 미술사적 큰 오점으로 기억 될 것입니다.
동시에 저는 프랑스 철학자인 사르트르 교수의 말이 기억이 나더군요.
"예술의 원천인 상상력은 자유로움과 연결된다"
이런점에서 결국 본인 스스로를 예술에 있어서 전문가라고 생각해왔던 히틀러는 "고전적 예술품"에 대한 개인적 취향과 진정한 의미의 예술에 대한 차이점을 몰랐다고 볼 수 밖에 없군요.
히틀러 스스로가 믿던 예술은 결국 국가 최고 권력을 잡으면서 생긴 자만심과 오만함의 산물이라는 것을 자살하기 직전에 깨달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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