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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감탄이 나올정도로 극도로 정교하게 조각된 파리 개선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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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감탄이 나올정도로 극도로 정교하게 조각된 파리 개선문

La Muette 2020. 5. 11.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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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랴뮤엣의 인류 이야기 입니다. 고고학, 역사학, 인류학, 미술사학으로 밝혀진 흥미진진한 우리 인류에 대한 스토리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하려 합니다. 여러 고대 문명을 포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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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은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기념물중 하나인 개선문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파리 개선문은 프랑스에서 가장 잘 알려진 기념비적인 건축물이자 파리의 대표 랜드 마크 입니다.

 

이미 프랑스 파리에 가서 이 개선문을 직접 보신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일단 이 개선문의 큰 규모에 압도 됩니다.

 

그런데 보통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여기서 인증샷만 찍고 이 개선문과 작별인사를 하지요.

 

그래서 이번 포스팅을 통해서 이 개선문에 대한 역사적 설명과 어떤 부조들이 새겨져 있는지 정확히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일단 우리가 아는 이 개선문의 정확한 명칭은 The Arce de Triomphe de l'Étoile에뚜알 개선문, 별의 개선문 정도로 해석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이 개선문이 위치한 샹제리제 거리 서쪽끝에 위치한 Place Charles de Gaulle (그전에는 Place de l'Étoile)에 개선문 주위로 12개의 대로가 별 모양으로 나있기 때문입니다. 

 

개선문주의로 12대로가 나있으며 이를 통해서 어느 방향에서든 이 개선문을 보도록 도로 설계가 효율적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파리 개선문은 1938년에 멕시코 시티에 있던  67 m 높이의 Monumento a la Revoulción 개선문이 완공 되기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개선문 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북한에서 1982년에는 평양에 파리 개선문을 모티브로한 개선문이 세워졌으며 이는 60m로 파리 개선문 보다 약간 더 높게 지어졌습니다. 

 

전 세계의 주요 개선문들의 크기 비교. 

 

이 개선문은 프랑스 혁명과 네폴레옹 집권기때의 전쟁에서 싸우다가 죽은 영혼을 기르기 위해서 지워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선문 내, 외부 벽에는 프랑스가 승리했던 전투의 이름과 제 1 프랑스 제국에서 사망한 총 660명의 군인들과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름들은 제 1 프랑스 제국, 즉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때의 전투에서 사망한 장군들 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신원확인이 불가능한 군인들이 묻혀져있습니다.

 

 

이 에뚜알 개선문은 1806년 Jean Chalgrin에 의해서 설계되었으며, 이탈리아 로마에있는 고대 로마황제인 티투스의 개선문 (Arch of Titus)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되었습니다. 

 

로마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
파리 개선문의 안쪽 천장의 꽃무늬와 전체적인 모습이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인상을 많이 줍니다. 

 

에뚜엘 개선문과 관련된 이야기

 

파리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한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

 

이 개선문의 기초부를 다듬는대만 2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1810년에 네폴레옹이 오스트리아 공주인 마리 루이(Marie-Louse)와 함께 파리에 입성했을때에는 아직도 개선문이 축조중이어서 임시로 목재로 개선문의 형태를 만들어서 이 맞이했다고 합니다. 

 

또한 부르봉 왕조의 왕정 복고기간 동안은 이 개선문의 건축이 일시적으로 중단 되었으며 루이 필리프 집권기간이후 1836년도가 되어서야 이 개선문이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이 거대한 기념물이 만들어지기 까지 총 3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셈 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에 의해서 축조되기 시작한 개선문이었지만, 이 개선문 아래를 직접 그가 통과한 것은 그의 사후 였습니다.

 

1840년 12월 15일, 세인트헬리나에서 생을 마감한 나폴레옹은 죽어서야 드디어 이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여 군사적인 업적을 쌓은 위인들의 묘소인 엥발리드 (Invalides)로 전달되어 안치되었습니다.

 

이 파리 개선문과 관련된 유명한 인물로는 나폴레옹 말고도, 소설 장발장으로 유명한 위대한 작가인 빅토르 위고 (Victor Hugo)도 있는데요.

 

그의 시신이 여러 프랑스의 역사적위인들이 묻힌 묘소인 팡테옹 (Panthéon)에 묻히기 전, 1885년 5월 22일 밤 동안 개선문 아래에 대중들이 볼수 있도록 놓여졌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이 정도로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에서 당시 엄청난 인기가 있었던 유명 작가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0세기 이후로는 군사적인 업적과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군대가 이 개선문아래로 행진하는 퍼레이드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프랑스 군대 뿐만아니라 1871년에는 독일군, 1919년 프랑스, 1940년 독일군 그리고 1944년과 1945년에는 프랑스군과 연합군이 이 개선문 아래를 통과하여 행진 하였습니다. 

 

독일군이 역사적으로 두 번이나 이 개선문을 통과 했는데, 어떻게 보면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 개선문에 대한 치욕적인 역사가 있을수도 있겠습니다. 

 

주요 4개의 부조

 

먼저 이 파리 개선문 앞 뒤로 가장 눈에 뛰는 4개의 부조 들이 있습니다. 

 

이 각 부조들의 이름은

 

- Le Départ des Volontaires de 1792;

- Le Trionmphe de 1810;

La Résitance de 1814;

- La Paix de 1815;

 

각 부조에서는 나폴레옹의 제 1 프랑스 제국의 역사에서 기억되어야할 중요한 사건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위 부조의 이름은 Le Départ des Volontaires de 1792 (또는 La Marseillaise)라고 불리는 작품으로 François Rude에 의해서 조각되었습니다.

 

이조각품은 1792년에 일어난 10월 폭동을 진압한 제 1프랑스 공화국 의용군들을 고대 그리스 스타일로 조각하였으며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조각되었습니다.

 

이 조각상에 묘사되어있는 날개를 가진 인물은 의인화된 자유 (liberté)를 의미하며 조각가의 아내인 Sophie Rude의 얼굴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조각한 François Rude는  아내를 저렇게 상기된 표정으로 묘사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합니다.

아내가 평소에 에너지 넘치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나 봅니다.

 

이 조각은 Jean-Pierre Cortot가 조각한 Le Trionmphe de 1810이라는 작품 입니다.

 

이 조각은 오스트리아-프랑스 사이 맺어진 쉰부른 (또는 빈) 평화 조약을 기념하기 위해서 조각되었으며, 가운데 조각되어있는 인물은 나폴레옹으로 승리의 여신이 나폴레옹의 머리위에 월계수관을 씌어주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조각상의 왼편에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 조각은 머리에 성곽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는 나폴레옹에 의해서 점령당한 도시를 상징하며, 또 다른 석판에 무언가를 쓰는 여인 조각은 쉰부른 조약문을 쓰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부조는 1814년에 Antoine Étex가 조각한 La Résitance de 1814라는 조각품이며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배되는 동안 프러시아, 영국, 러시아를 주축으로 모인 연합군과의 제 6차 충돌 (the War of the Sixth Coalition)에서 패배한 프랑스 저항군을 기르기 위해서 조각되었습니다. 

 

위의 조각은 La Paix de 1815라고 불리는 조각품으로 이것 또한 Antoine Étex가 조각했으며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한 결과로 맺어진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을 기르기 위해서 조각되었다고 합니다.

 

가운데위에는 고대 로마의 전쟁과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가 있습니다.

 

이 4개의 부조들은 대략적으로 나폴레옹이 탄생할수 있었던 배경을 시작으로 몰락의 길로 빠지면서 이로 인한 다른 이웃국가들과의 전투에서 패패한것에 대한 치욕과 이로 희생되었던 프랑스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조각된것으로 보입니다. 

6개의 프랑스에 승리를 가져다준 전투를 묘사한 부조

개선문 정면부에 새겨진 6개의 부조들은 프랑스 혁명과 내폴레옹시대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을 묘사해놓았습니다.

제마프 전투 (La bataille de Jemappes)

제마프 전투는 1792년 11월 6일 현재의 벨기에의 제마프 지역에서 프랑스군과 신성로마제국간의 전투로 프랑스가 일시적으로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를 컨트롤 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전투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전투는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만큼 사상자도 많이 내어서 그렇게 인상적인 승리를 안겨주지 못한 전투 였습니다. 

막쏘 장군의 장례식 (Les funérailles du général Marceau)

막쏘 장군은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라인(Rhine) 지역의 알텐키르켄 (Altenkirchen) 에서 오스트리아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이 퇴각하는 것을 보호 하다가 1796년 9월에 27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이 막쏘 장군과 관련된 정보들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개선문의 부조에 나올 정도면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인물로 보여지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그 젊은 영혼의 희생정신을 기르기 위한 의도로 보여집니다. 

아르콜 전투 

아르콜 전투는 프랑스 혁명전쟁의 일부로 이탈리이 북부 아르콜이라는 지역에서 1796년에 프랑스군과 오스티라(신성로마제국) 사이의 충돌입니다. 이때 프랑스는 19000명의 병력과 오스트리아는 24000명의 병력으로 프랑스쪽은 45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오스티리아는 6000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 입니다. 

아부키르 전투 (La bataille d'Aboukir)

1799년에 이집트 아부키르 지역에서 일어난 프랑스가 오토만 제국군을 물리치고 굴복시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총 7700명의 보병과 17문의 포 그리고 1000개의 기병중 220명이 전사하고 600이 부상당했으며, 오토만 제국군은 약 20,000명에 가까운 병사와 30문의 포중 2000명이 사망하고 11,000명이 익사했으며, 5000명이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피라미드전투

피라미드 전투는 1798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집트의 맘루쿠 왕조의 군대를 격파한 전투로, 이를 계기로 이집트 맘루쿠 왕조의 몰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1805년 체코의 아우스터리츠 지역에서 프랑스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제국 동맹국간의 전투로 나폴레옹의 제 1 프랑스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를 가져다준 전투로 역사에는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총 병력 65,000 에서 75,000 중 전사자 1305명과 부상자 6,940명 포로 573명이었으며 러시아 오스트리아 동맹은 총 병력 73,000-85,000명중 무려 15,000명으로 사상자로 낸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써 오스티리아의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라는 결과를 냈습니다. 

 

이 개선문에 새겨진 부조들을 통해서, 이 개선문이 나폴레옹과 프랑스 대혁명시기 모습의 프랑스의 역사를 대변할 정도로 그 역사적 상징성이 큽니다. 그리고 단순히 프랑스가 승리한 전투만 이 개선문에 남긴것 뿐만 아니라 패배의 역사로 부터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도 담겨져 있습니다. 당시 잠시동안 유럽 대륙과 지중해를 호령했던 프랑스의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함축적으로 볼수 있었으며 이는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기념물일지 모릅니다. 나폴레옹 이후로 온 유럽의 여러나라와 해외에서 군사적으로 많이 박살난 역사를 가지게 되었지만 이때의 나폴레옹시대의 황금기는 프랑스인들에게 영원히 남아있을것입니다. 

 

http://blog.ac-versailles.fr/openstex2016/index.php/post/21/04/2016/Les-4-Statues-de-l-Arc-de-Triomphe

https://www.eutouring.com/images_paris_statues_1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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